디지털 회로를 가진 낭만주의자들
2024. 10. 18 — 11. 3 · 종료

흙은 불을 두 번 지납니다. 초벌에서 세라믹이 되고, 재벌에서 유약이 녹아 표면을 덮습니다. 오래 걸리는 일이고, 디지털은 그 반대편에 있습니다. 이 전시는 둘이 부딪히는지 보완하는지를 묻습니다. 일곱 작가가 각자 다르게 답했습니다.
도예는 물과 흙이 만나 형상을 이루고, 가마의 뜨거운 열을 통과하면서 완성되는 아날로그적 예술이다. 흙 속의 수분을 점차 줄여가며 형태를 굳히는 소성의 과정은 물질의 변화를 섬세하게 통제하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중요한 역할을 하며, 가마 밖의 세계와의 만남을 앞두고 인간과 사물은 공히 명상적 호흡을 가다듬는다. 도예는 이러한 아날로그적 특성 덕분에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감각과 깊은 통찰을 유지하는 예술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계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매체와 방법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가질 수 있음을 가늠해 보고자 한다.
소성 과정은 도자예술의 본질을 완성하는 중요한 단계로, 초벌 소성을 통해 흙은 세라믹으로의 물리적 변환이 이루어진다. 이어지는 재벌 소성은 높은 온도에서 이루어지며, 이때 유약이 녹아 표면을 코팅하고 점토는 더욱 치밀한 구조로 변모한다. 기물이 더욱 단단해지고 영구적인 형태를 갖추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은 물질의 물리적 성질을 완성하는 동시에, 인간의 깊은 인내를 요구한다. 도예가 지닌 느리고 섬세한 작업 과정은 디지털 시대의 빠름과 대비되지만, 이는 오히려 두 세계가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예의 전통적인 물성은 인간만이 느끼고 인내할 수 있는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디지털 기술은 이를 확장하는 새로운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무림은 참여 작가 강경연, 박동엽, 박철찬, 안정윤, 이천수, 천종업, 허정은의 작업세계에서 그들 각자의 고유한 예술적 접근 방식을 확인했다. 이 작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현대 도예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하며, 디지털적 접근뿐 아니라 전통 도예의 물성과 형태에서도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공존하며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열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려 한다.